제주목사 이약동에게서 배우는 청렴
서귀포시 총무과 기록물통계팀장 현승민

조선 전기 문신 이약동은 제주 지역에서 대표적인 ‘청렴 목사’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인물이다.
그는 제주 목사직을 마치고 떠나며 재임 기간 동안 사용하던 말채찍을 성문에 걸어 두고 섬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관직에 몸담으며 사용했던 관의 기물을 사적으로 취하지 않았다는 이 짧은 일화만으로도, 이약동이라는 인물은 청렴의 상징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왜 청렴해야 하는지를 묵묵히 묻고 있다.
현기영 선생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에 따르면, 조선시대 제주 목사의 임기는 길어야 2년, 대부분은 1년 남짓에 불과했다.
당시 관직 사회는 매관매직이 만연한 시기였고, 제주 목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목사 자리를 얻기 위해 거액의 뇌물을 바쳤고, 부임과 동시에 그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제주도민들에게 각종 세금과 공물을 거두어들였다.
그 과정에서 공납으로 인한 피해는 참혹했다. 오늘날 제주의 대표 특산물로 알려진 전복과 감귤은 당시에도 귀한 공물이었다. 중앙에 전복 한 개를 바치면 되었지만, 실제로는 열 개를 거두어 아홉 개를 착복하는 구조가 관행처럼 이어졌다. 제주도민들에게 공납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약동은 제주 목사로 재임하며 공납의 수량을 감하고, 세공을 현실에 맞게 조정해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당연한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대의 관행을 고려하면 이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는 권한을 사익이 아닌 책임으로 사용했고, 그 태도는 오늘날까지 ‘청렴’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공납을 걷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수많은 선택의 순간 앞에 서 있다. 규정 하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편의와 원칙 중 무엇을 택할 것인지의 문제는 결국 누군가의 부담과 불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청렴은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떠날 때 남겨야 할 것을 정확히 남기고 가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이약동의 이름이 오랜 세월 기억되는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청렴은 남기고 싶은 이름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