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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꼰대냄새가 물씬 풍기는 선별지원

글만 아는 선비, 무슨 짝에 쓸 것인가

결국 정부 여당이 2차재난지원금을 선별지급하겠다고 방침을 밝혔다.

 

그 선별은 어떻게 할 것인지, 추석 전 짧은 기간에 모든 국민이 납득할 만한 선별 모습을 보일는지 우려스러운 시선이 가득하다.

 

1차 재난지원금 당시 불거졌던 선별. 보편 지급 논란이 보편으로 가닥을 잡은 후 별 잡음 없이 신속히게 마무리됐던 것과는 달리 아마 이번은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치적으로 이후 전개될 보수언론의 공격과 지원대상에서 배제됐으나 살림이 어려운 국민들의 불만을 어떻게 잠재울 지도 관심사다.

 

보편지급을 해야 한다며 정부 여당의 방침에 반발했던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따르겠지만 아쉽다는 입장을 페이스북을 통해 전달했다.

 

"백성은 가난보다도 불공정에 분노하니 정치에선 가난보다 불공정을 더 걱정하라"'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2차 재난지원금 선별 지원이 가져올 부정적인 결과를 우려했다.

 

이 지사는 "어쩔 수 없이 선별 지원하게 되더라도 세심하고 명확한 기준에 의한 엄밀한 심사로 불만과 갈등, 연대성의 훼손이 최소화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면서도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 모두가 어렵고 불안한 위기에 대리인에 의해 강제당한 차별이 가져올 후폭풍이 너무 두렵다"고 말했다.

 

꼰대(KKONDAE)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책 결정 책임자들

 

꼰대는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다.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형된 속어이다.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던 이 말은 한류가 확산되면서 전 세계인이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됐다.

 

영어로는 확실하게 표현할 길이 없어, 영국도 사전에 그냥 꼰대로 적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나이 많은 남자가 자신의 식견만 옳다며 우기는 모습이 꼰대의 전형이다.

 

그 숱한 반대의견을 뒤로하고 밀어붙이는 이낙연 대표와 홍남기 부총리를 두고 한 네티즌은 꼰대를 보는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글만 아는 선비, 무슨 짝에 쓸 것인가

 

이번 정책 결정을 두고 대다수 국민들은 책상 머리에 앉아 계산기만 두드리니 저런 결정을 했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백성은 불평등에 더 분노한다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도 그렇지만 삶의 현장 속을 살피면 과연 선별지급이 옳은 지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 책에 나온 대로 경제정책을 꾸려가다 보니 민심과는 동떨어진 결정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는 목소리가 크다.

 

19108, 나라가 일제에게 완전히 넘어갔을 때에 지리산 구례 땅 월곡리에 은거하던 한 선비가 절명시(絶命詩)네 수를 남기고 죽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이 선비가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다. 그는 세종 때 정승을 지낸 명재상 황희의 후손.

 

상당한 학식을 가진 선비로 그의 삶과 글을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은 아직도 고고했던 그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대에 같은 지역에 살았던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은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다.

 

자는 서백(瑞白).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장흥, 전라남도 담양 출신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고경명의 후손이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구례의 연곡사에서 전사하였다.

 

같은 선비였던 이 둘 사이에는 한 서린 이야기가 있다.

 

의병을 일으키기 직전 고광순은 사람을 매천에게 보내 격문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매천은 고광순의 요청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이미 판이 기운 판에, 혹은 그 격문을 써줬다가 나중에 당할 횡액이 두려워서 등의 이유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광순이 일본군에 밀려 연곡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매천은 현장을 찾아 대성통곡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저항한 선비 앞에서 그는 같은 선비이면서도 격문을 써주지 않은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나무라며 글만 아는 선비 무슨 짝에 쓸 것이냐고 한탄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도 목숨을 버렸다.

 

그래도 격문 써주기를 거부했던 책상머리 선비로서의 한계에 대한 회한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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