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 (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칼럼)홍콩사태를 바라보는 관점들

홍콩을 둘러 싼 중국과 미국. 영국 등의 대립구도가 심상치 않다.

 

여기에 EU까지 가세해 중국의 보안법 도입을 비난하는 가운데 중국은 중국대로 우군 만들기에 돌입한 모습이다.

 

홍콩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홍콩반환을 앞두고 만들어졌던 영화 '중경삼림', 남.녀의 사랑얘기라는 단순한 분석보다는 'Calfornia Dreaming'의 신나면서도 애처로운 팝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당시 스산했던 홍콩의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우리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면 대부분 중국공산당의 만행이라고 규정짓는 가운데 간간이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는 네티즌들도 있다.

 

여기서 다른 지점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홍콩의 역사는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중국대륙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왜 다른 삶을 영위해 온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세계열강들, 제국주의의 중국침략과 아편전쟁

 

산업혁명 등으로 힘을 가진 영국 등 서구열강은 19세기 들어 중국을 노렸다.

 

가장 앞선 나라는 영국이었고 미국. 프랑스. 독일 등도 합세했다.

 

청일전쟁 이후 신생 제국주의라 일컬어졌던 일본도 나중에 돋보이게 된다.

 

이 속에서 영국은 1842년 아편전쟁에서 중국을 굴복 시킨다.

 

아편전쟁은 영국 스스로도 인정하듯 가장 추악한 전쟁이다.

 

중국의 은()을 노렸던 영국은 중국과 무역을 원했다.

 

산업혁명으로 모직물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우리가 흔히 영국신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입는 양복 등이 모직제품) 영국은 이를 중국에 팔아 중국의 은을 챙기려했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당시 누군가 말했듯, ‘중국의 부자들은 비단옷을 입고 가난뱅이들은 벌거벗고지냈다.

 

영국 모직제품이 고전하는 사이 중국은 차()와 도자기를 영국에 팔았다.

 

영국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중국에 은을 갖다 바치는 셈이 됐다.

 

이에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阿片)을 중국에 팔기 시작했다.

 

국민이 마약중독자가 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던 청나라 정부는 임칙서(Lin Tsehsu , 林則徐)를 광동에 보내 영국의 아편을 압수하는 등 유통과 판매를 막았다.

 

이에 영국은 군대를 보내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던 중국을 무너뜨리고 전쟁 배상의 하나로 홍콩을 임차하게 된다.

 

2차 아편전쟁에서도 승리한 영국은 1898년 신계지구를 마지막으로 지금의 홍콩영역을 확정했다.

 

그냥 영구 식민지로 삼으면 될 걸, ‘99년 임차로 했을까.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제국주의자 A의 행복은 나머지 B.C.D 등의 불행이다.

 

즉 영국이 지금 홍콩 지역을 영구 식민지로 삼을 경우 나머지 제국주의들도 중국의 땅을 노릴 것이기에 영국의 최선은 99년 임차라는 주장이 나왔다.

 

당시 청나라 실세였던 이홍장(Li Hungchang , 李鴻章)의 논리라는 설이 유력하고 이를 영국이 받아들였다는 주장도 힘을 얻는다.

 

어쨌든 약속대로 홍콩은 199771일 중국에 반환됐다.

 

영국과 중국은 일국양제를 약속했다.

 

홍콩 땅은 중국에 속하지만 제도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적용하라는 것으로 잘 지켜져 온 것으로 나타난 반면 중국은 보안법 도입으로 이를 해소하겠다는 방침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홍콩도 중국의 한 부분이라고 못을 박은 것이다.

 

중국 현대사에 열외가 된 홍콩을 본토인과 중국 민족주의자들은 어떻게 볼까.

 

10만 대장정에서 6000여명만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진 중국 공산당은 결국 1949101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북경에서 선언한다.

 

또한 대약진 운동. 문화혁명 등을 거치는 동안 수 천만명이 불행 속에 숨졌고 천안문 사태의 아픔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나 홍콩의 역사는 결이 달랐다.

 

영국의 제도와 자본주의 속에서 그들은 번영했고 비록 빈부의 차가 크긴 하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잘사는 지역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같은 중국인이지만 다른 세상에서 살았고 지금은 생각마저도 다른 듯 하다.

 

G2로 인정받는 중국정부는 지금의 사태를 미국.영국이 합세한 또 다른 모습의 제국주의의 간섭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지.

 

미국. 영국. EU 등 세계를 주도하는 서구 국가들은 혹시 홍콩 사태를 빌미로 다시 중국을 굴복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아니라면 홍콩 시민들의 자유의 의지를 중국공산당이 무도하게 꺾으려는 사건에 불과한 지.

 

역사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철학과 지식에 의해 갈리는 것이 당연하다.

 

이제 코로나 19라는 부담을 같이 진 중국은 마치 19세기처럼 가장 강력한 세력들과 맞서야 한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엄청난 나라가 된 중국이 과연 이들을 뿌리칠 수 있을지, 아니면 적당하게 타협해서 다음을 기약할 지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만은 분명한 듯 하다.





와이드포토

더보기


사건/사고/판결

더보기

배너